어제는 같이 독일어를 공부하는 친구 Fan과 강의가 끝나고 사과를 따러 갔다.

나무 위에 사과가 많이 열려있는데 아무도 관심이 없고, 가져가도 된다고 어떤 아주머니가 알려주었다고 한다.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목요일은 휴일이고 금요일은 강사가 아파서 수업이 없어서, 만나려면 이번주밖에 없어서 점심을 먹고 지하철을 탔다.

 

대학교에서 3개의 정거장을 지나서 내린 곳은 마을이라고 부르면 적합할 것 같았다.

푸르고 넓은 들판이 양옆으로 펼쳐져 있고, 머리 위로는 경비행기가 날아다녔다.

Fan의 말로는 나무로 구획이 구분된 먼 쪽의 들판은 경비행기 연습장이라고 했다.

걸어가는 길에 간간히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나와서 산책시켰는데, 그 크기가 기본 보더콜리부터 큰 것은 정말 말라뮤트만한 것이 있었고

들판을 자유롭고 신나게 뛰어나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10분을 걸어가서 사과를 따기 위해 마음이 부풀어 있는데, 나무 위에 아무것도 열려있지 않았다.

당황하며 지난번에는 많이 열려있었다는 Fan에게, 지난번이라는게 언제냐고 물어봤더니 한 달 전 쯤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황당해서 '너의 시간감각은 나와 정말 다르구나'라고 하며 혹시라도 열려있는 사과가 있나 돌아다녔는데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런데 손 닿는 곳에 있는 사과는 모두 사라졌고, 높은 곳에만 꽤 주렁주렁 열려있었다.

여러번 폴짝폴짝 뛰어봤는데, 딱 손 끝에서 5cm정도 아쉽게 닿지를 않아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지,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형광 주황색 자켓을 입은 미화원 아저씨들이 트랙터같은 것을 타고 대화를 나누고 계시길래

"저 사과를 따도 되나요? 독이 없는 건가요?"라고 물어보니, 시 소속의 나무라 누구나 사과를 따도 되고, 독이 있는 사과가 어딨냐며 껄껄 웃으셨다.

감사인사를 하고, 나보다 키가 작은 Fan을 내가 목마를 태워볼까 했지만, 그녀를 어깨에 얹어 일어나려는 순간 불가능하다는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1m정도 되는, 나무에서 떨어진 두껍고 긴 나무줄기가 있길래 잔가지를 쳐내고 주워들어서 사과를 때리기 시작했다.

 

첫 시도는 요령이 없어서 사과는 커녕 나뭇잎과 그 위에 있던 먼지들만 우수수 떨어졌는데,

두 세개정도를 따고 나니 어떻게 하는 지 대충 감이 와서, 나는 사과를 때리고 Fan은 에코백에 신나게 사과를 줍기 시작했다.

하나를 주워서 먹어보니, 정말 너무 신선하고 시원하고 상큼해서, 비타민 C가 전두엽에 팡팡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지켜만 보면서 자기는 사과가 필요 없어서 너를 위해서 왔다는 Fan에게 너도 해보지 않을래 라고 물으니 갑자기 같이 막대기를 들어서 나무를 때리기 시작했다.

정말.너무.재밌었다.

 

그렇게 신나게 나무를 쑤석거리고 있는데, 미화원 아저씨 한 분이 오시셨다.

선한 눈으로 '저쪽에는 더 사과가 많이 달린 나무가 있다, 거기에는 엄청 긴 나무 막대기도 있다'고 하셨는데, 정말 너무 귀여우시다고 생각했다.

그리로 가서 본격적으로 사과를 따기 시작했는데, Fan은 나보다 키도 작고 약해서 가벼운 나무가지로 낮은 쪽에 있는 걸 따고,

나는 좀 더 높이 있고 크고 볕을 잘받은 사과를 팡팡 때렸는데, 뭔가 하나를 하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과가 후두둑 떨어지니 성취감이 정말 굉장했다.

그렇게 가방 한가득 사과를 담고 더 이상 무거워서 나르지 못할 정도로 담고 나니 대략 6kg정도가 되는 것 같았다.

다 모아서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울타리에서 먀,먀 소리가 나서 가보니 고양이 두 마리가 도망을 갔다. 두 마리다 어느정도 큰 고양이 같았는데, 연애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Fan은 나무막대기를 수풀 사이로 가져가서 숨겨두었다. 그리고는 나보고 기억해두라며 다음에 또 와서 쓰자고 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정말 재밌었나 보다.

 


- 갓 딴 사과들

 

사과 사진을 친구들에게 보낸 뒤 Fan이 토끼를 볼 수 있는 들판으로 가자고 해서 그리로 갔는데. 

정말......... 넓은 들판에... 토끼는 없고 토끼똥만 가득 있었다. 나는 토끼가 그냥 아무데나 똥을 흘리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나름 한 군데에 모아두었다.

희안하게도 바닥에 양송이 버섯처럼 생긴 흰 버섯들이 여기저기 나 있길래, 이게 뭐냐고, 이것도 사과처럼 가져가도 되는거냐고 물어보니

Fan이 고개를 저으며 공기가 습한데 토끼가 여기저기 똥싼데서 난 버섯이라고 알려주었다.

뭔가 생긴게 독이 있을 것 같아서 짓밟아서 뭉갰보았더니 뭔가 노란 진액같은게 나왔다.

 

- 토끼의 응가 수집

 

토끼는 정말 여기저기 굴을 파두었는데, 어떤것들은 정말 깊고 넓었고, 어떤 것은 파다 만 것도 있고, 굴 입구를 따라 엉겅퀴 꽃이 자란 것도 있었다.

조그만 앞발로 대체 어떻게 저렇게 판 것인지 정말 신기했다. 역시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계속 하면 작은 토끼도 굴을 팔 수 있구나, 싶어서 새삼 경이로웠다.

Fan이랑, 토끼도 자가주택자인데 우리는 집이 없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토끼굴을 구경하고, 흰 버섯이 보일때마다 발로 짓밟으며 파괴의 희열을 느꼈다.

들판 여기저기에 강아지들이 뛰어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토끼가 안보였는데, 아주 멀리에 갈색 토끼 세네마리가 있었다.

색이 바닥에 떨어진 낙엽이랑 똑같아서 처음엔 Fan이 계속 알려줘도 구분을 못하다가, 움직이려고 폴짝거릴 때 하얀 꼬리과 배가 사라졌다 나타났다 해서 알 수 있었다.

 


- 제일 크고 넓었던 토끼의 자가주택

 

들판의 거의 끝자락에 가니 높은 철조망으로 만든 목장같은 곳에 당나귀 두 마리가 보였는데, 옛날에 제주도에서 조랑말이랑 친구가 된 기억이 떠올랐다.

보통 말은 사납고 발로 차이면 위험하대서 가까이 가지 않는데, 운전을 하다가 말이 보이길래 그냥 가서 구경하니까 말이 나에게로 다가와서 긁어주었더니

콧김을 뿜으며 즐기고, 몸을 슬슬 움직이며 몸 전체를 긁어달라고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독일의 유기견 보호소에서 털이 떡진(?) 한 강아지도 그런 적이 있다.

그래서, 연한 갈색의 당나귀에게 다가가서 귀 밑과 목덜미를 긁어주니, 말이나 개와 똑같이 몸을 슬금슬금 움직이면서 긁어주는 걸 즐겼다.

 


- 순한 당나귀가 긁어줌을 즐기는 모습

 

 


- 성질이 더럽고 건장한 당나귀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데, 다른 좀더 체구가 크고 갈색 얼룩무늬가 있는 당나귀가 오길래 긁어주려고 하는데 입으로 손을 물려고 했다.

나쁜놈이라고 욕하는데, 내가 긁어준 당나귀는 서열이 낮은 것인지 얼룩당나귀에게 밀려서 저만치 뒤로 물러났다.

얼룩 당나귀가 갑자기 내 앞에서 흙을 발굽으로 팍팍 파면서 뭔가를 요구하는 행동을 하길래, 혹시나 싶어서 사과중에서 제일 맛없어 보이는 것을 하나 줬더니

어마어마하게 침을 흘리면서 순식간에 다 먹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순한 당나귀한테 주니까, 그 당나귀를 못살게굴면서 자기가 먹어버렸다.

그래서, 사과를 반으로 쪼개서, 작은 건 바로 앞에 있는 얼룩당나귀에게 주고 큰 건 순한 당나귀에게 던졌는데,

사과가 당나귀 머리에 콩 맞아서 당나귀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상황파악을 못하더니 이내 냄새를 맡고 사과를 먹었다.

 


- 은근한 표정으로 사과를 요구하는 염소

 

당나귀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옆에 울타리로 가보니 염소들이 한 10마리정도 있었다.

갑자기 우리를 보더니 몰려와서 어쩔줄 모르겠어서, 걔네에게도 사과를 줬더니, 철조망 사이로 주둥이를 내밀어서 사과를 먹으려고 낼름거렸다.

나는 약간 약을 올려 보려고 주둥이보다 조금 멀리 떨어뜨려서 놀려먹고 있는데, 덩치가 제일 크고 뿔이 큰 염소가 오더니 다른 염소들을 밀쳐냈다.

그러니까 철조망과 그 안에 낮은 나무 울타리 사이로 서열이 낮아보이는 염소들이 다가와서 몸을 끼우더니

정말 (-ㅅ-) 이런 표정으로 은근하게, 그리고 불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메에에에'거렸다. 나는 이미 소중한 사과를 당나귀들한테 세 개나 털린지라

염소들에겐 제일 볼품없어보이는 사과를 주었는데, 뿔이 있는 염소들끼리 그걸 먹겠다고 머리를 쾅쾅 박는데 소리가 커서 깜짝 놀랬다.

 

- 울샴푸로 빨아주고 싶은 라마의 거친 털

 

마지막으로, Fan이 말한 '목이 길고 이상하게 생긴 동물' 을 보러 갔는데, 그것은 바로 라마였다. 사실은 알파카인지 라마인지 몰라서 우리는 그냥 알파카라고 불렀다.

하얀 털에 때가 꼬기작하게 낀 한 마리와, 갈색 털의 다른 한 마리가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넓은 목장 안을 한가롭게 걸어다녔다.

그런데 당나귀나 염소와는 달리, 딱히 사람에 관심이 없었다. 알파카야, 라고 수없이 외쳐봤지만 무시하며 풀만 계속 뜯어먹어서 조금 구경을 하다가 말았다.

 

다시 10분정도, 왼쪽에는 철도, 오른쪽엔 넓은 무 혹은 당근같은게 심어진 밭을 끼고 천천히 걸어서 역으로 돌아갔다.

바람이 많이 불고 쌀쌀한 날씨여서 발 근처에서 따뜻한 온풍이 나오고 있었는데, 사과를 따고 들판 여기저기를 흥분하며 걸어다녀서 몰랐던 피로가 느껴졌다.

창문을 보면서 무슨 Garten(독일말로 정원)이 보이길래, 저건 무슨 정원일까 하는 대화를 나눴는데,

옆에 앉으신 은색 단발머리에 눈이 파란 50대 아주머니께서 '저건 정원이 아니라 이름만 그렇고 식물, 씨앗이나 정원용 도구를 파는 큰 가게다'라고 알려주셨다.

 


- 이런 좌판이 ㄱ자로 놓여있었다

 

Fan은 Bonn에서 저녁에 다시 독일어 강의를 들어야 해서, Bonn 중앙역의 시내로 갔는데, 넓은 광장에서 화분과 꽃을 많이 팔고있었다.

그런데 무슨 양배추 같은 것이 있길래, 이것은 먹으라고 파는 걸까, 혹은 장식용일까 대화를 하고 있는데 또 어떤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먹어도 무해하지만, 자기가 스페인에 갔을 때 넓은 정원에 이게 가득 심어져 있었다면서, 관상용일 것 같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런데 갑자기 웬 남자가 오더니 중국어를 하는데, Fan이, 나를 잡아 끌더니 '완벽한 중국말로 돈을 달라고 했다'고 해서,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고 도서관으로 갔다.

 


- 아름다운 본 시립 도서관 내부

 

Bonn의 도서관은 조명부터 내부가 너무나 아름답고, Bonn특유의 부티가 느껴져서 사과를 따고 동물을 구경하던 건 금새 잊었다.

잠깐 설명하자면, Bonn은 서독의 수도였었고 굉장히 아름답고 넉넉한 부티가 나는 그런 도시이다. 우리가 유럽, 그리고 독일 하면 떠오르는 그 스테레오 타입에 들어맞는 그런 도시.

저 사진 오른쪽 멀리에 보이는 전기코드 사용한 좌석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이번 주에 배운 것들과 앞으로 필요할 정보들을 좀 정리해두고, 자료들을 좀 구경한 뒤 Fan과 헤어졌다.

 

짝궁이 불고기잡채에 미쳐있어서 근 3일째 매일 저녁 불고기를 하는데, 요 근래 당면이 떨어져서 그냥 스파게티로 해줬더니, 오는 길에 당면을 1000kg 사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중앙역 근처에 있는 아시아마트에서 잡채를 사서 양 옆구리에 끼고 서둘러서 기차를 탔는데, 맞은 편에 앉은 할아버지가 너무 멋있었다.

배가 나오고 백발에 평범한 키여서, 언뜻 보면 별로 특징이랄게 없는 할아버지는, 허리를 꼿꼿히 펴고 은테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 계셨다.

그의 옆자리에는 모서리가 꽤 낡은 두꺼운 가죽재질의 서류가방이 있었는데, 연극 같은 것에서, 어느 유럽에 사는 나이 든 의사의 왕진용 가방 같은것으로 적합할 것처럼 보였다.

허기가 져서 사과 하나를 닦아서 먹다가 휴지통을 열려고 하는데, 한 손으로는 사과를 들고 있어서 오른손으로 낑낑대니, 책을 읽다가 슬쩍 잡아주셨다.

역시 매너가 신사를 만든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잘못탔는데, 꼭 거기서 매 번 그러는 거 보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5호선이 온다고 해놓고 13호선이 오고 하는 게 문제인 것 같아서

내 스스로의 한심함이나 실수를 탓하지 않고, 요새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어하는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너의 당면이 집으로 가고 있다는 문자를 보내자, 신이 난 짝꿍이 하트와 국수와 행복한 얼굴이 담긴 이모티콘을 가득 보냈다. 그렇게 잡채가 좋을까?

 


- 불고기에 미친 인간 (3개월째 거의 매일 먹는 중)

 

10분이면 집에 도착할 길을 50분을 돌아서 겨우 내렸는데, 짝꿍이 역으로 마중나오더니,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신이 난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반가운 것일까, 나의 당면이 반가운 것일까 궁금해하며, 횡단보도 불이 파란불로 바뀌자 짝궁에게  다가가 무거운 사과 가방을 쥐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냉장고에 고기가 딱 1인분이라, 재빠르게 불고기와 짜파게티를 동시에 끓이며, 사과를 유리그릇에 정리하고, 망고 스무디를 만들어서 저녁을 먹었다.

 

 

주워온 사과와, 집에 있던 사과를 유리그릇에 담아두니 보기가 정말 좋았다. 오른쪽에 있는 빨간게 산 건데, 9개정도에 5천원이다.

맛은 주워온게 살짝 더 신선하고 신 맛이 나는데, 사실 나는 사과 맛은 잘 몰라서 거의 비슷하다.

 

너무너무 기분이 좋고 행복한 하루였다. 어쩌면 사과를 많이 따서 성취감이 느껴져서였을 수도 있고, 오늘따라 사람들이 호의적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서였을수도,

혹은 내가 동물을 너무 좋아하는데 여러가지 동물을 만나고 와서, 혹은 그냥 새 학기의 설렘, 혹은 그 모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제 하루를 꼭 적어보고 싶어서 블로그 적기로 했다.

 

아 참, 그 외에도 어제는 크고 작은 우스운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프린터 쓰는 법을 도서관 직원한테 배우고 있었는데, 내가 '양면으로 인쇄할 수도 있나요'라고 물어보자, 직원이 '아주 좋은 질문을 하셨다'면서

바로 옆에 있는 이 직원분이 그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셨다. 내가 언제 완료되냐고 여쭤보자, 바로 그 옆에 앉아계신 분께 또 물어보시며,

'들으셨죠? 그렇다네요.'라고 하셨는데, 내가 물어본 걸 바로 옆에 계신 분이 만들고 계신 그 상황이 너무 우스웠다.

 

오전에는 고작 5분 늦어서 지하철을 놓친 이유로, 기차와 다른 지하철이 줄줄히 연착을 해서 강의에 40분이나 지각을 했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그게 기억날 정도로 어제는 신나는 하루였다. 저녁에는 너무 피곤해서 집안일을 미루다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사과를 하나 먹었다.

그리고 설거지, 빨래, 청소를 모두 마치고 지금 글을 쓴다.

1시간정도로 짧게 쓰려고 했는데 기억나는 걸 다 적어보려고 했더니 벌써 1시간 30분이 다 되어간다.

 

아마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행복한 날이 매일 오진 않겠지만, 힘든 날이 왔을 때 이런 날을 추억하며 버텨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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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전에 나름 괜찮다는 브랜드 칼을 샀었다.

누구나 알만한, 어디서 싸구려 칼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식칼을 할인가에 저렴하게 샀다.

처음에는 신경이 곤두설정도로 정도로 예리해서 한동안은 다룰 때마다 조심했지만,

시간이 흘러 닭고기를 써는데 손목으로 힘을 주고 체중으로 눌러야만 자를 정도로 칼이 무뎌졌다.

 

육개월 전, 닭다리에서 살을 바르다가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숫돌을 주문했다.

예전에 요리를 배울 때 혼자 숫돌에 칼을 갈곤 했었는데 이미 10년도 넘어서 순서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유튜브에서 칼 가는 법을 검색하고 천천히 따라해보았다.

 

숫돌을 물에 적시고, 칼을 조금 세워서 앞 뒤로 슥슥, 뒤집어서 슥슥...

그러나 아무리 갈아도 날이 예리해지지 않았고, 중간중간 이가 나간 부분도 그대로였다.

도대체 어떻게, 얼마나, 어떤 강도로 해야 할 지 몰라서 짜증이 치솟았다.

어쩌라는거지? 왜 지금은 안되는거지? 칼이 문제인가, 아님 돌이 싸구려인가.

알바하는 가게 주방에서 요리사들이 하는 걸 봤을 때는 그렇게 어려워보이지 않던데.

칼을 왜 이렇게 빨리 이가 나가게 만든거야. 아니면 내가 잘못된 영상을 찾은건가.

 

좀 더 갈아볼까, 하다가, 아 모르겠다, 이따가 하자, 하고 옆으로 치워두었다.

 

...

 

그렇게 시간이 또 흘렀다.

숫돌은 싱크대에서 선반으로, 선반에서 찬장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번에 느낀 그 좌절감과 짜증이, 숫돌을 볼 때마다 되살아났다.

날은 점점 무뎌져서 토마토를 썰면 토마토 껍데기가 잘리는건지 찢어지는건지 모호할 정도였다.

 

예리한 칼보다 무딘 칼이 훨씬 위험하다. 무딘 칼일수록 힘을 주다가, 자칫 엇나가면 손을 깊게 베기 때문이다.

그 쯤부터, 막연히 '아, 정말로 이건 안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다였다.

 

...

 

요 근래에는 애인이 나에게 매일 잡채를 해달라고 타령을 했다.

(나는 지금 애인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중이라,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무딘 칼로 소고기와 당근을 매일같이 썰다 보니, 자칫하면 어느 날 내 손가락이 잡채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는 고기 써는데 손목이 너무 아파서 울음이 터졌는데, 애인이 놀라더니 그 뒤로는 대신 썰어주었다.

 

며칠 전이었다. 식사 후 느긋하게 부엌을 정리하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고 찬장을 뒤지다가, 숫돌과 눈이 마주쳤다.

만지면 푸스스하고 부서질 것 처럼 바짝 말라서는 정돈되지 않은 비닐봉투들과 정답게 뒹굴고 있었다.

오후 두 시, 부엌에는 볕이 들어오고 있고, 창문 밖으로는 나무들이 광합성을 하고, 바람에 맞춰 담쟁이 덩쿨이 흔들렸다.

애인은 자기 방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리고 있고, 나는 할 일도 딱히 없었다.

그래 뭐, 하고 가벼운 결심을 했다.

 

행주에 물을 적시고, 그 위에 숫돌을 올리고, 수도꼭지를 숫돌 위로 올려 물을 졸졸졸 틀었다.

칼 가는 법이 아니라, 넷플릭스 드라마를 틀었다.

마치 주기적으로 칼을 갈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자연스럽게..

 

어느정도 물이 흡수 된 숫돌 위에 칼을 올리고, 사선으로 슥슥 갈기 시작했다.

저번과 똑같았다. 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또, 계속 갈았다. 여전히 비슷했다.

 

보던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만 해봐야지, 하고 아무 생각없이 계속 갈다가

햇볕에 날을 비춰보니, 날의 중간 부분의 날이 다른부분보다 살짝 더 누워있었다.

 

'아 되고 있다' 라는 확신이 들어서

칼을 갈고, 날을 확인하고, 다시 갈고, 볕에 비춰보기를 반복했더니

날이 조금씩 칼 등쪽으로 녹듯이 갈려 들어갔고, 군데군데 이가 나간 부분이 사라져서 결국에는 일자로 반듯해졌다.

칼날을 손가락 지문에 긁어보았더니 지문의 오돌도돌함에 맞춰 도도독 하고 긁히는 느낌이 났다.

 

숫돌을 뒤집었다.

사포도 종류가 다르듯이, 숫돌도 거칠기가 모두 다르다. 내가 산 숫돌은 양 면이 다른 거칠기로 되어있다.

그래서 숫자가 낮고 거친 부분으로 갈다가, 날이 어느정도 서면 숫자가 높고 고운 부분으로 더욱 예리하게 다듬는 식으로 날을 세우면 된다.

이 때부터는 드라마 소리를 낮추고 살짝 긴장했다. 여차해서 손가락 끝이 칼 밖으로 나가면 예쁘게 포가 떠질까봐 무서웠다.

 

한 10분여를 앞뒤로 긴장해서 삭삭 갈고 난 뒤,

흐르는 물에 칼을 씻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오렌지를 꺼냈다.

칼이 얼마나 잘 드는지 보려면 오렌지 제스트를 만들어 보면 안다고 배운 적이 있다.

오렌지 제스트란, 오렌지 껍질에서 아주 바깥의 주황색 부분만 얇게 포를 떠서 다시 얇게 썬 것을 말한다. 

그걸 시럽과 섞어서 케이크나 과자위에 장식하기도 하고, 크레페에 얹어 오렌지의 향긋함을 더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래서 오렌지의 한쪽 껍데기를 잘라서 얇게 포를 뜨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무딘 칼을 써서 그랬는지 힘조절이 잘 되지 않아서 손을 거의 벨 뻔 했다.

그리고 돌돌 말아서 채를 썰었더니...

 

아, 그래, 칼은 이래야지. 이렇게 썰리는 게 칼이지, 하는 만족감이 몰려왔다.

너무 만족스러워서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는데, 이웃이 나를 보면 저 사람 왜 저래, 싶었겠지? 

 

당근도 썰어보았는데,

사각사각하며 칼이 들어가는 소리가 정말 경쾌하게, 드디어 내가 원하는 만큼 얇게 썰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썰었던 제일 얇은 당근이 무생채였다면, 날이 선 칼로 썬 당근은 소면처럼 얇고 청순하게 반투명했다.

뿌듯했다. 내가 썰고싶었던 채는 바로 이거였다고.

 

내친김에 과도도 갈아보았는데, 웬걸, 한 번 해봤다고 이렇게 쉬울줄이야?

뭐지 싶을 정도로 너무 자연스럽게, 빠르게, 제대로 칼이 갈렸다.

하긴 한 때는 할 줄 알았던 일이니까, 할 줄 모르는게 아니라 하기 싫었던 게 문제였을 것이다.

 

주방을 정리하고, 허브티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쉬운걸 하는데 왜 그렇게 짜증이 나고 하기 싫었을까?

6개월 전의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졸린데도 잠에 들지 못해 짜증내는 어린아이를 보는 것처럼...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그런 집중을 감당할 정신적 능력 자체가 없었던거겠지.

 

과장 섞어서, 중세 시대에 태어났으면 귀찮아서 그냥 쓰다가 손을 베고, 대충 방치하다가 패혈증에 걸려서 팔 한 쪽을 잘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약이 발달된 시대에 태어나서 집중력 약도 처방받고 다치면 소독도 할 수 있으니 참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칼을 간 이후로 요리가 3포인트 정도 즐거워졌다.

손목이 아프지도 않고, 야채가 사각사각 썰리는 감각에서 쾌감마저 든다.

애인이 잡채를 해달라고 하면 귀찮긴 하면서도 신난다.

 

해야 하는 일들에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해내는 이런 날들이 앞으로 더 많았으면 좋겠다.

소소하지만 간직해두고 싶은 일상의 경험을, 장문쓰기 연습 겸 적어보았다.

 

 

9월 20일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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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전 알바하던 가게 일본인 아저씨가 과자 한 봉지를 주셨는데 정말 너무 맛있어서 그 봉지를 버리지 않고 오래 간직했던 기억이 난다.

적당한 버터의 향, 적당히 입안에서 파스라지는 느낌, 적당한 당도... 모든것이 딱 적당했다.

얼마나 향긋했는지, 햄스터도 산책하던 중 갑자기 달려가더니 아무것도 없는 봉투 안에 들어가서 한참을 바스락거리며 미련을 부렸다.

 

어쨌든, 그래서 그 가게를 가야지 하면서도 너무 멀어서 미루고 미뤘다가

오늘 단톡방에서 그 동네의 빵집 얘기가 나왔는데,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가게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아서 괴로웎다.

그래서 두뇌를 풀가동해보았더니, 희미하게 노란 로고에 새가 있었다는 것이 기억이 났고, 인터넷을 뒤져보니

일본인 제과점이 아니라 독일 제과점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그 과자를 팔고 있다.

 

그 얘기를 하다가 맛있는 맥추도 추천받았다.

 

아아, 너무 행복하다. 다시 사러가야지.

이것이 인생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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